11/04/07

 차곡차곡 잘 모아서 구석에 짱 박아뒀던 나의 우울이 기지개를 켤 때 즈음 난 사무실에서 우두컨히 앉아 있었다. 조금씩 익숙해지는 일 위로 전혀 모르겠는 일들이 쌓여가고 그런것도 익숙해지면서 익숙해야 저지르는 실수들이 나오고 그 실수는 예전보다 다소 격해진 억양의 상사의 화를 부른다. 조금 우울했지만 죽을만큼은 아니다. 어쨌든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상사들은 좋은편이니 내 상황이 정말 나쁜것은 아니리라. 그냥 그정도이긴 해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.

그리고 우울이 기지개를 켰다. 번쩍. 턱. 우울함이 들어있던 벽장은 작았음으로 우울의 손이 문에 닿는 소리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. 아. 오는구나. 예전처럼 억지로 막을 이유도 없었다. 세번의 소개팅이 삑사리 나고 무책임한 어떤 상사는 회사를 나가면서 어마어마한 일 더미를 던져주었으며 그 것에 틱틱 거리는 다른 상사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음으로 난 그 우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.

기분은 괜찮다. 적당한 우울함은 업무 집중도도 올려주고 주량도 약하게 만들어주니까 어쨌든 취할 때 까지 마시는 나로서는 돈을 절약하는 샘이다. 그정도면 정당한 거래. 우울은 그렇게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.


그리고 다시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기 시작했다. 그것도 술먹고 집에 들어간 양변기 위에서. 다시 읽으니 새롭구나. 라고 생각했다. 아 이런 힘든 인생도 있겠구나 싶었던 주인공들은 29살의 나에게 예전보다 깊고 단단하게 들어왔고 곧 우울함의 친구가 되었다. 그들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들이니 난 또 기꺼이 그들의 자리를 마련했다.

어쨌든 예전과 다른점이라면 우울하면 잠을 잘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잘 잔다는 것. 주말엔 자전거를 타니까(격하게 타니까) 또 피곤해서 잠든다는 점. 정도가 달라졌다. 딱히 잠을 이루기 위해 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습관적으로 마시고 태웠다. 그냥 딱 그정도가 좋았다. 그리고 이따금 그때 그 아이가 생각났고 또 다른 아이가 생각났다. 그때 그 아이는 아마 살다가 한 두 번쯤 더 마주칠 일이야 있겠지만 이젠 정말 끝이란 걸 아니까. 조용히 버릴 수 있었고 또 다른 아이는 뭐 언제든 가면 있으니까.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으니까 괜찮다.

라고 우울을 달래주었다.


적절한 동거.

그 정도면 좋다.




덧글

  • Praesepe 2011/04/09 01:19 # 답글

    항상 주장해왔잖은가. 우울은 나의 힘! 이라고. 훗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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